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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박준




11.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14.
그해 너의 앞에 서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 입속에 내가 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15.
어느 커다란 무덤 앞에서
당신이 내 손바닥을 펴더니
손끝을 세워 몇 개의 글자를 적어 보였다.
그러더니 다시 손바닥을 접어주었다.
나는 무엇이 적힌 줄도 모르면서
고개를 한참 끄덕였다.



49.
아무리 좋은 음식도 많이 먹으면 탈이 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며 맺는 관계에도 어떤 정량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 정량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나는 한번에 많은 인연을 지닐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51.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70.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71.
더운 숨이 터져나왔다. 지난밤에는 울음 몇몇이 끝까지 차오르지도 못하고 낮은 곳으로 흘러내린 듯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은 우리의 환상인지도 몰랐으나 실제로 옥상 문을 열면 창백한 하늘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었다.



88.
사랑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명확하지 않다. 연애를 처음 시작한 날을 기억하고 백 일, 1주년, 천 일 등을 기념할 수는 있지만 사랑이 처음 시작된 날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연애는 상대에 대한 사람의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자라나 있을 때 시작되는 것이므로 연애의 시작은 사랑의 시작보다 늘 한발 늦다.
이별의 경우라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사랑의 감정이 모두 끝났는데도 이별하지 못하고 연애를 이어가는 경우도 많고 이와 반대로 사랑이 끝나지 않은 채 이별하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사랑의 시작과 끝에는 어떤 징후들이 감지되는데 그것은 소설 속 문장처럼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내 경우에는 그것이 소리였다. 터뜨리는 웃음이나 나지막이 흥얼거리는 상대의 콧노래, 심지어는 마른기침 소리까지도 살갑게 느껴질 때 나는 내가 사랑에 빠졌음을 알아챈다. 반대로 상대가 가진 특유의 말투나 부르는 노래, 음식물을 씹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때 나는 이 사랑이 곧 끝을 맞이할 것이라 직감한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소리가 들리는 방식이 다르다. 저녁이 가고 어둠이 밀려오는 속도가 다르다.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이 다르고 새벽 창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서늘함이 다르다. 분명 늘 혼자 먹던 음식인데도 다시 그 음식을 혼자 먹어야 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 다르다. 깊은 잠에 빠진 상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연한 빛이 맴돈다면 잠에서 깬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느새 짙음으로 가득하다.


상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그 누군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 혹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그 사랑이 과거 '그 누군가'가 받았던 것이라거나, 훗날 다른 '그 누군가'가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로 사랑을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곧잘 상한다.
하지만 생각을 한번 더 깊이 가져가보면 그리 억울해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대상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나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부를 방법이 없다.



102.
사월, 서풍이 들면 매화나무의 흰 꽃들은 얼마쯤 바람을 타고 날아가 낯선 이의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이런 일은 슬프지 않게 됐습니다.



102.
사람에게 미움받고.
시간에게 용서받았던.




108.
그해 여름 나는 남도의 어느 소읍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목표했던 분량만큼 글을 쓰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타지에 왔다고 해서 평소 안 써지던 글이 갑자기 잘 써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그곳에서 글을 쓰는 데 골몰하는 대신 낯선 환경을 경계하고 그에 적응하느라 분주했다. 또 그곳에서 만난 새로운 것들 가운데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찾아내고 싫어하는 것들로부터 애써 마음을 피해 다니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는 그곳에서 한끼에 반찬을 아홉 가지나 주는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 식당과 그 식당의 할머니를 좋아했다. 사이다 버튼을 눌러도 콜라가 나오는 느티나무 아래 음료자판기를 좋아했고 바로 옆 2백 원짜리 일반 커피와 3백 원짜리 고급 커피의 맛이 전혀 다르지 않은 커피자판기도 좋아했다.
반면 그 식당에서 며칠씩 외상을 하고 값을 치를 때마다 꼭 2,3천 원씩 돈을 헐어 내는 한 중년의 남자를 싫어했다. 하루종일 흰 개를 묶어두면서도 물그릇을 자주 마르게 두는 느티나무 옆 카센터 주인을 싫어했다. 그는 주로 건물 안에 있다가 카센터로 들어오는 차를 보고 흰 개가 짖으면 밖으로 나오곤 했는데 반려동물에 대한 의식은 고사하고 동업자에 대한 예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가장 자주 한 일은 걷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걸을 때도 있었고 끼니를 거르고 걸을 때도 있었다. 볕을 맞으며 걸었고 비가 오는 날에도 걸었다. 걷고 있는 시간만큼은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내가 스스로 세운 목표에 대한 중압감 같은 감정들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어 좋았다. 대신 발이 아프다, 목이 마르다, 버드나무는 수피의 색이 유독 진하다, 같은 직관적인 생각들을 자주 했고 오래전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허언들을 되새기거나 보고 싶은 사람을 두엇쯤 떠올려보기도 했다.
여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던 날, 나는 처음 각오했던 한 권 분량의 원고를 쓰기는커녕 몇 개의 단상만을 메모해둔 채 별 소득 없이 서울로 향해야 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낯설기만 했던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이 더없이 친숙해졌다는 것, 얼굴과 목이 많이 탔다는 것, 그리고 평소 지겹고 답답하기만 했던 원래 내 삶의 일상과 거처가 조금 그리워졌다는 사실이었다.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111.
누구인가를 만나고 사랑하다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엇인가 모르는 구석이 생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세계 속에서 자라는 상대가 점점 울창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이것은 내가 상대의 세계로 더 깊이 걸어들어왔다는 뜻이다.
단칸방, 투룸, 반지하, 옥탑 혹은 몇 평이라고 말하며 우리들의 마음을 더없이 비좁게 만드는 현실 세계의 공간 셈법과 달리 사랑의 세계에서 공간은 늘 광장처럼 드넓다.
이 광장에서 우리가 만나고 길을 잃고 다시 만나고 헤어진다.




128.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