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에 반대한다. (중략) 우리를 위협하는 적은 성차별주의적 사고와 행동이다. 여성이 자신의 성차별주의를 직시하지도 바꿔내지도 못한 채 페미니즘 정치의 기치를 내건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끝내 소멸해버릴 것이다.
167. 가부장제적 남성성은 남자들을 병적으로 자기도취적이게 하고 유치하게 굴게 하고, 단지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주어지는 (어느 정도 상대적인) 특권에 심리적으로 의존하게끔 부추긴다. 많은 남자들이 자기충족적인 핵심 정체성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나 특권이 사라지면 자기 삶이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 운동은 남자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되찾는지를 가르치고 내면의 잃어버린 소년을 되찾아 영적이고 정신적인 성장을 도모하라고 적극적으로 격려했다. (중략) 미국 대다수 남성들은 자기 정체성이 본질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설령 가부장제에 매달린다고 해도 그것이 문제의 일부라는 사실을 감지하기 시작하고 있다. 일자리가 없고, 일한 만큼 보상도 받지 못하고, 여자들이 더 많은 계급 권력을 쥐는 상황에서 돈 없고 힘없는 남자들은 자기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기 쉽지 않다.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는 결코 자신의 약속을 책임지지 못한다.
234. 페미니즘 정치의 정신은 지배를 종식하기 위한 헌신이다. 사랑은 결코 지배와 강압에 기반한 관계에 뿌리내릴 수 없다. 가부장제적 사랑의 개념을 매섭게 비판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중략) 우리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비전의 맥박은 여전히 근본적이고 필연적인 진실과 공명한다. 즉, 지배가 있는 곳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은 동반자 관계와 육아를 통한 상호성장과 자아실현의 가치를 강조한다. 누구나 욕구를 존중받고, 누구나 권리는 누리고, 누구든 예속이나 학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관게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가부장제가 관계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고수하는 모든 것에 반대된다. 우리 여성들은 대부분 아버지나 남자 형제, 또는 이성애자 여성의 경우 연애관계까지 사생활에서 접하는 친밀한 관게에서 남성의 지배를 경험했거나 경험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여성과 남성이 모두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을 받아들일 경우 두 사람의 감정적 행복은 더 깊어질 것이다. 진정한 페미니즘 정치는 언제나 우리를 속박에서 자유로, 사랑이 없는 곳에서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이끈다.
해제 - 권김현영
272. 2017년 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는 지나치게 공부를 많이 하고 자기를 계발하는 여성들을 실질적으로 처벌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보고서의 마지막에는 실력과 경험ㅇ르 갖춘 여성들의 눈이 높아져서 더욱 결혼을 기피하고 있으므로, 국가에서 "비밀리에" 여성들의 눈을 낮출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자는 제안으로 끝난다. 이 모든 것이 농담이 아닌 시대에, 페미니즘은 어떤 언어와 전략을 가져야 할까. 개인적으로 실력을 쌓고, 준비를 하는 것으로는 공정한 대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삶의 다음을 준비할 시간이 부족한 여성들을 더 차별할 근거가 될 뿐이다. 혹자는 이 각자도생의 시대에 페미니즘이라는 '빨간 약'을 먹고 나면 사는 게 더 힘들고 불편해지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시대에 특히 '예민함'이라는 감각이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민하다는 것은 상처를 잘 받는다거나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상황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예민함은 이상한 상황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민하다는 건 주어진 질서의 오류와 모순을 눈치챌 정도로 지적이며 동시에 강인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을 멈추지 않는 삶이라는 점에서 예민함이라는 감각은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에의 배려 혹은 통치되지 않으려는 의지로 이어질 수 있다. 예민함은 약자에게 강요되는 부정의한 제약을 거부하는 감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은 때로 권력이 될 수 있다. 예민한 사람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손에 쥔 사람이다. 사실 진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 착취와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예민할 겨를이 없다. 예민함이라는 감각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게 되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스스로 점점 무력해진다고 느끼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중략) 페미니즘은 약자를 '위한' 정치학이지, 약자가 '되자'는 정치학은 아니기 때문이다.
274. 여성이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은 언제나 변화하고, 그에 따른 차별의 양상도 달라진다. 또한 여성들은 모든 계급과 지역에 존재하고, 모든 연령을 경험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적 파트너를 선택하고 가족을 구성한다. 여성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은 언제나 변화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다. 실제로 페미니즘은 그 어떤 사상보다 활발하게 내부를 비판하고 논쟁해왔다.
275.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희생자이다. 과거와 현재는 사랑으로 향한 길에 너무나 많은 장애물을 놓았다. 우리는 평화로울 때조차도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즐길 수 없다." 여성을 하나의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묶어놓고 그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이들을 단죄하는 문화에서는, 우리는 결코 우리의 차이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 비판에 열려 있고, 차이를 축복할 수 있게 된다면, (나 자신으로서 자유롭게 살 권리를) 억압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페미니즘이 매번 갱신될 수만 있다면, 그래서 페미니즘이 모두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