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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 연애 하지 않을 자유




01.
13p) '연애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일단 몇 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홉뜨고 나에게서 어떤 '하자'를 찾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연애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요소가 하나라도 포착되면, 그때부터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열폭'이나 '정신 승리'로 번역된다.


02.
13p) '~하지 않을 자유'가 성립되지 않는 '~할 자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03.
14p) 연애는 그저 그 사람이 그 순간에 누군가와 맺고 있는 관계이자, 선택할 수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의 형식 중 하나다.


04.
49p)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도대체 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군가에게나 '연애의 가능성이 있는' '누군가에게 매력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여지를 남기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이것은 뷰티 프로그램이나 패션 사이트에서 툭하면 "남자들이 좋아하는 메이크업" "여친 생기는 옷"만 주구장창 반복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도 상통한다. "너, 그러고 다니면 남자가(여자가) 안 좋아해." 아니, 내가 뭐 걔들 좋아하라고 태어났나?


05.
56p) 연애 관계는 상대방에게 '나'를 한껏 기울여놓는 경험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공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감은 애인과 연애 관계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외롭거나 쓸쓸한 사람들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연애를 처방한다. 이쯤 되면 '연애 오남용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연애하지 않기 때문에 공감해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은, 애인을 사귀면 공감해주는 사람이 생긴다는 판타지만큼이나 불안정하고 허술하다.


06.
77p) 친절을 그린라이트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를 '연애 가능군/불가능군'으로 이분화하기 때문이고, 그만큼 우리 사회의 관계가 연애로 획일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07.
79p) 누군가가 나에게 '선을 넘은' 친절을 베풀어 그것이 너무나 명백하게 그린 라이트로 느껴진다면, 마음이 흔들리는 단계까지는 당신의 자유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방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권리를 침해하거나, 곤란한 방식으로 구애해도 된다는 프리패스는 아니다. 그린 라이트인 줄 알고 직진했는데 아니면, 신호등을 때려 부수는 대신 멈추거나 통행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08.
127p) 문제는 결국 특정 성별에게만 요구되는 '애티튜드'다. 여자아이들은 언제나 겸손하고 부드럽고 상냥하도록 훈육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거나 주장을 관철하면 '기가 세다'는 딱지가 붙는다.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상냥하고 센스 있게 말할 줄 모르는 '센 여자'는 당연히 '남자들이 싫어한다'. 인기가 없는 것이 큰 결점이 되는 연애과잉의 시대, 따라서 똑똑하다, 기 세다는 말은 오히려 욕이나 빈정거림이다. 연애의 장에서 나는 자주 상대방이 "되게 세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되게 세다니? 누가 보면 내가 각목을 부러뜨리는 쇼라도 한 줄 알겠다.


09.
245p) 그럼 우리는? 너를 가장 빛나는 별로 만들고자 스스로 어둠이 된, 가진 거라고는 어디에도 자랑할 수 없는 순정과 하드 가득한 네 자료와 텅텅 빈 통장밖에 없는 우리는 어떡해, 이 사랑꾼아.

평범한 연애,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으면 평범한 통장과 평범한 인지도를 받아들여야 한단다.
네가 누리는 것, 보통의 네 나이 또래 애들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모든 혜택은 네가 무언가를 포기함으로써 우리 역시 우리의 평범한 생활을 포기하고 너에게 만들어준 것들이잖니. 팬과 아이돌은 그런 관계거든. 너에게 기대하는 건 정말 최소한의 노력이야.


10.
258p) 내 덕질의 대상이, '내 새끼'가 내 입에 밥 한 숟갈 넣어주지 못해도, 툭하면 통장을 털어 가고 속을 새카맣게 태워도, 덕후는 그저 걔가 나를 강렬하게 쳤던 그 아름다운 모습 자체로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니까.


11.
270p) 날 빠순이라고 부르는 건 상관없어, 사실이니까. 하지만 날 빠순이라고 놀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중략) 빠순이가 빠순이를 빠순이라고 부를 때와 빠순이가 아닌 사람이 빠순이를 빠순이라고 부를 때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집단 외부에서 사용하는 빠순이의 의미는 명백히 비하와 조롱을 담고 있다.


12.
310p) 연애를 하면 좋은 점이 분명 존재한다. 누군가에게는 연애가 삶의 전부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좋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러니까 연애해' '연애하지 않는 너는 불쌍해'로 넘어가는 것이 연애지상주의의 문제점이다.

연애와 결혼이라는 획일화된 그물이 당신을 포획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애가 없다는 사실을 곧장 결핍과 미완으로 벜역하는 무례함에 동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연애만을 승인하는 세상에, 더 다양하고 소중한 당신의 연애를 들이밀었으면 좋겠다.